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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FONT color=blue size=3><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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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 width="55%">작성자 : 관리자(<A href="javascript:go1('./mail/mail.php?SM=ad@ad.com')"><FONT color=#0000ff>ad@ad.com</FONT></A>) </TD>
<TD align=right width="45%" height=20>조회수 :91 (IP:74.6.67.224)</TD></TR></TBODY></TAB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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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FONT color=blue size=3><B>中國林氏 遺蹟地 踏査記 (4호)</B></P></FONT></TD></T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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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style="MARGIN-LEFT: 5mm"><FONT color=red>FROM:http://jeonkuklim.or.kr/soge7.php?Dgu=3&ser=&sel=&mode=show&bs1=23</FONT><BR>事務局長겸 長興林氏 서울支會 會長 林 東 根<BR>韓國林氏中央會 임원 및 종원은 2001년 12월 9일(음 11월 25일) 무영은비간공(武榮殷比干公) 제향(祭享) 3030周年 기념행사에 참배(參拜)하였다. 비간공고화상(比干公古畵像)이 세워진곳은 福建省 南安市 관교진(官橋鎭) 내착촌(內村)이다 여기에 세워진 이유는 오래전부터 比干公의 화상(畵像)이 복건성에 있으면서 각 고을에서 해마다 추첨하여 古畵像을 모셔 제사를 지네는 풍습이 있었는데 중국문화혁명(中國文化革命)때 중지되면서 제사를 지낼수 없게되고 古畵像의 행방도 몰랐다 그러던 중 文化革命폭풍이 지나고 國家에서 인정한 比干公 祭祀를 지네려고 백방으로 古畵像을 찾던 중 현 比干殿터에서 은밀히 보관되여 있음을 발견하였고 이곳을 기념하기 위하여 현재와 같은 比干殿이 건립되었다 한다.<BR><BR>○ <STRONG>比干</STRONG>公의 古畵像<BR>中國政府에서는 比干公의 古畵像과 印章을 國寶로 지정하고 祭享日에는 政府機關에서 공식적으로 참여하게된다. 古畵像은 선지(宣紙)에 그려저 비단으로 받처저 있으며 明나라(年代 不明)때 그려졌다 한다. 또한 比干公의 고화상은 上位만 펴 보인다고 한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 說이 있는데 첫째는 주왕(紂王)이 比干公을 죽일 당시 그 심장을 꺼내서 칼로 베고 그 얼굴을 태워버렸기 때문에 그 흉함을 보이지 않게 함이요 둘째는 무릇 범인(凡人)들 앞에 全身을 내놓지 않게 함이요 셋째는 발아래 많은 兵馬가 따르고있기 때문에 보이지 않게 함이라 한다. 따라서 一說에 강태공(姜太公)은 比干公의 심장(心臟)이 도려내질 것을 예언(豫言)하였다는 傳說도 있었다 한다 또한 2004년 世界林氏大會때는 比干公古畵像 全身을 공개한다고 하였다.<BR>참고로 比干公의 婦人(中國文獻에 正妃로 기록)의 姓氏는 진씨(陳氏:臺灣에서발간한 林氏大宗譜, 中國 林佛功著 中華林氏, 林允華編 黃帝子孫比干後裔長林山林氏源流에는 陳氏로 기재), 규씨(芼氏 : 中國 <STRONG>林樹丹</STRONG>著 海內外林姓源流), 위씨(氏:林允華編 黃帝子孫比干後裔長林山 林家海東韓國林氏源流淵源族譜)등으로 記錄되어 있다.<BR><BR>○ 東渡紀念碑<BR><STRONG>林樹丹</STRONG>氏의 말에 의하면 팽성(彭城)에 八及公 東渡地 記念碑를 세우게된것은 中國政府의 公式的인 승인(承認)하에 比干文化硏究會가 세운 것으로 公信力이 있다고 말하였다. 따라서 八及公東渡地 記念碑 건립장소 선택에 대한 逸話를 소개하였다.<BR>장소 선택에는 여러 가지 의견들이 있었으나 그중 하나 방법은 比干殿에서 표찰(標札)을 던 저 장소를 정하는데 7회를 투찰(投札)하였으나 모두 彭城의 현 위치로 나타나(어려운 일이 있을 때는 比干殿에서 해결 방법을 찾은 것 같음) 지금의 장소를 정 하였다고 林樹丹常委가 귀 뜸하여 주었다. 12월 10일 버스 편으로 팔급공 동도기념비(八及公東渡記念碑) 건립 장소에 이르렀다, 이곳 행정구역은 福建省 泉州市 惠安縣 東嶺鎭 彭城村(현재지명:항자촌 港仔村)으로 南安市에서 東으로 50분 고속도로로 가면 泉州市이고 여기서 惠安縣까지 30 분 거리 그리고 東嶺鎭을 거처 彭城까지 20분 정도 들어가면 자그마한 漁村마을이 나온다 마을입구를 들어갈 때 마을 수호신(守護神)이 세겨 진 석각문(石彫門)을 지나 바닷가에 나가면 石築으로 곧게 만든 방파제가 있고 방파제에서 바다 양편에 전망대 전각이 6각형으로 10여m들어가 세워져 있다 생각보다는 깨끗하고 조용하며 멀리 해안에 나무숲이 아름답게 보였으며 모래사장은 하얀빛을 띄었다 마을은 약20여 家口로 廢村에 가까웠고 林炳九 副會長이 말씀하신 八及公 生家는 몇 년 전에 집터가 타인에게 팔려 헐려 있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아쉬운 일이었다 다행 이도 마을 한가운데 석조건물에 타이루 장식을 한 殿閣이 있었는데 이 전각은 蘊公의 7대 孫女가 할아버지를 추모하기 위하여 건축하였다고 하나 내부는 볼수 없었다 나의 생각으로는 八及公이 東渡한지 1100여년 전으로 後孫도 없고 記錄物도 없는 상태에서 지금까지 八及公의 흔적이 남았다고 하는 것은 믿기 어렵고 다만 漁村이기 때문에 漁夫의 安寧을 빌기 위한 우리나라 성황당(城隍堂)과 비슷한 것이 였을 것이라 추정한다.<BR>우리 일행은 八及公 東渡 出發地 海邊가 碑壇에 모였다 그곳은 해안으로부터 약 7m떨어진 사질토 위에 석축과 세멘트로 제단을 쌓고 그 위에 烏石으로 높이 약 180cm, 두께 25cm, 넓이 60cm의 크기에 前面 上端은 龍을 陰刻으로 세겨 놓고 그 밑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있었다.<BR>따라서 碑의 후면(後面)은 비워 있는데 韓國林氏中央會에서 어떠한 형태(한글 또는 漢文)로든 글을 보네 주면 세겨 넣겠다고 하였다 碑石은 동쪽 海岸을 바라보고 있으며 좌, 우, 뒷편은 民家가 있어 管理하기는 좋을 것 같다. <BR>하늘에는 구름이 쌓이고 가끔 비가 내리며 약간의 바람도 불었다. 韓,中宗親들은 八及公 新羅渡海處 碑壇앞에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여 1100 여 년 전의 일들을 상상하며 除幕式에 參席하였다. 참으로 우리로서는 歷史的인 순간이라 아니 할 수 없었다. 傳說的이요 部分的인 記錄, 그리고 여러 가지 學說로 韓國林氏 都始祖에 대한 說이 많이 있었는데 西紀 2001年 12月 10日 11時를 기해 韓,中宗親會와 특히 中國政府官員인 中國人民政治協商會議 福建省南安市委員會 李秀棉 副主任 등이 參席 立會한 行事고 보니 韓國林氏의 獨立性을 보였고 韓國林氏의 연원(淵源)이 確立됨을 마음깊이 뜨거운 감동을 느꼈다.<BR>韓國林氏中央會 林芳鉉會長外 18명의 訪問團과 中國측 比干文化硏究會 林姜維會長外 다수의 任員이 보는 앞에 붉은 천으로 덮인 碑文을 除幕하고 기념촬영을 하였으며 특히 林芳鉉會長님의 말씀 가운데 오늘의 행사는 中國측 林氏宗親들이 보는 가운데 韓國林氏의 正體性과 兩國宗親 協調關係를 강조하는 것이었다. 오늘 韓,中林氏의 歷史的인 행사를 후대 宗人들에게 참고가 되도록 除幕式에 사용한 붉은 천을 갖이고 왔으며 여기에 참가한 19명의 名單을 기록하겠다,<BR>韓國林氏中央會 林芳鉉會長 ,常任副會長겸海外交流分科委員長 林炳九, 事務局長 林東根, 林學圭, 林哲洙, 林完植, 林炳旭, 林容德, 林菜善, 林炳喜, 林漢德, 林東喆, 林英植, 林東杓, 林炅浩, 林秉善, 林準熙, 林守鎭, 林東浩 林의 始祖 晋安郡王 祿公의 陵을 찾았다. 행정구역으로는 福建省 泉州市 혜안현(惠安縣) 도령(塗嶺) 구룡강(九龍崗)이라 한다. 祿公의 陵은 도로변에서 20m떨어져 있으며 제일먼저 민림시조(林始祖)라 세겨진 석방대문(石坊大門)을 지나 드러 서면 넓은 석조평지(石造平地)가 있고 여기서 돌계단을 올라서면 석장군(石將軍), 석양(石羊)이 좌우로 서있고 가운데 웅장한 陵(능: 墓)이 있는데 陵의 중앙부에 진안군왕임공(晋安郡王林公), 고봉귀인공씨(誥封貴人孔氏)를 합장(合葬)한 비문(碑文)이 있었다. 陵의 규모는 한마디로 웅장하고 돌로 주위를 쌓고 陵위에는 거북모양(龜紋)의 무늬로 세겨진 돌로 덮여 있었다 그리고 陵의 주위에도 둥글게 150cm의 높이로 석축을 쌓아 당시 祿公의 위대함을 느꼈다.<BR>文獻上으로는 묘역(墓域)뒷산에 구룡강(九龍崗), 임시조 휘록공구룡혈묘(林始祖 諱祿公九龍穴墓)라 세겨 진 바위가 있다하나 우리 일행은 보지 못하였고 아쉬움이 있다면 주위 山에 푸른 숲이 울창한 나무가 서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BR>墓域에서 좌편으로 10m내려오면 祿公의 古畵像 그리고 比干公 婦人등을 비롯한 10餘分의 畵像이 묘셔 있는 진안군왕사(晋安郡王祠)가 웅장하게 있었다. <BR><BR>○ 晉安郡王<BR>우리 일행은 陵과 殿閣안에서 준비된 향을 피우고 고개를 숙여 參拜를 올렸다. 여기서 祿公에 대하여 간략하게 살펴보면 公은 지금의 강소성(江蘇省) 휴저(暾穰옛지명 하비(下)에서 서기276年(西晉 武帝泰始1)에 낳시어 356年(東晋 穆帝永和 12)에 졸(卒) 하시였다. 公은 父親 영공(穎公)과 함께 지금의 福建省 晋安에 내려가 家門을 이루니 이분이 晋安堂 林의 始祖가 되시었다. 公은 晋나라(이때 中國은 五胡十六國)王室을 이루셨고 합포태수(合浦太守)를 歷任하시고 東晋 明帝때 王의 칙명(勅命)으로 진안군태수(晋安郡太守)가 되시었다. 公은 東晋 穆帝 永和 12년에 卒하시어 진안왕(晋安王)으로 추봉(追封)되시니 林氏始祖 견공(堅公)의 직계64세손이다<BR>오후4시가 넘어갔다 아쉬운 시간이었다. 福建省 보전시(矗田市) 서천미(西天尾)에있는 九牧祠 즉 蘊公, 蘊公의 父, 祖父, 九兄弟의 墓와 祠宇를 參拜하려 했는데 여기서도 5시간 거리가 된다하여 뒤돌아 서게 되었다. <BR>遺蹟地 踏査를 마치고 林芳鉉會長을 비롯한 韓國訪問團 全員과 中國측 宗親代表들이 함께 참석하여 선물 교환과 중국측 硏究發表 및 韓國측 質議의 순서로 會議를 진행하였다.이때 중요한 내용 중 하나는 八及公에 대한 발표였다. 임소천 국립 화교 대학부교수겸 복건성 성씨 원류 연구회 임씨위원회 상무위원(林少川 國立華僑大學副敎授 겸 福建省姓氏源流硏究會林氏委員會 常務委員)은 八及公이 新羅로간 3가지 證據를 말하였다.<BR>○첫째 : 福建省 泉州市 惠安縣 東嶺鎭에 彭城村(현 지명 港仔村)이 있고<BR>○둘째 : 中國지도상에 彭城이라는 지명이 있는데 이것은 개인이 제작한 것이 아니고 國家機關에서 發刊한 것이기 때문에 신빙성(信憑性)이 있으며<BR>○셋째 : 文回公孫의 족보에 八及公이 文範의 一子로 기록되어 있으므로 韓國林氏 始祖는 中國에서 건너간 八及公이란 結論을 내리었다 이리하여 筆者는 重要한 사실을 발견했다 하고 이것을 확인하기 위하여 韓國林氏中央會 任員의 으로 林樹丹氏와 林少川氏에게 質問하였다. 그러나 나의 질문에 林樹丹씨의 答은 아직까지 中國어느 문헌(族譜포함)이나 記錄物은 발견하지 못하였고, 文回公 族譜문제는 통역(通譯)이 잘못되어 오해한 것 같다고 말하고 福建省에 우리 林氏에대한 族譜가 많이 있는데 이것을 수집하여 찾아 보겠다고 결론을 지었다 또한 林少川씨는 答을 하지않았다. 참으로 우리의 기대가 실망으로 돌아 섯다.<BR>나의 판단으로 中國측에서 말하는 八及公에 대한 기록(林樹丹, 林X功, 林少川著書)과 彭城海岸에 팔급공도해처(八及公渡海處) 기념비단(記念碑壇)을 설정(設定)한 과정(過程)도 中國측 기록을 근거(根據)로 한 것이 아니라 韓國에서 제공한 文獻을 근거로 하지않았나 하는 생각이었다. 兩國代表가 선물을 교환할 때 中國측에서는 기념표장(紀念標章)에 다음과 같은 글이 새겨 있었다.<BR><BR>韓國林氏中央會中國訪問團<BR>參加 比干公殉國3030周年祭典<BR>忠烈揚千古, 三仁譽五州<BR>中國武榮殷比干文化硏究會 辛巳 年 十二 月<BR><BR>금번 中國訪問에서는 여러 가지로 뜻이 깊었다. 綜合해보면 내착촌(內村)에 있는 比干公 古畵像의 발굴유래(發掘由來)와 比干殿 건립지(建立地) 선정과정(選定過程)을 알았고, 晋安郡王陵의 석물구조(石物構造)도 보았으며, 彭城에 있는 八及公 東海處 紀念碑 除幕式에 韓國林氏中央會에서 참석한 것은 韓,中林氏관계의 세로운 이정(里程)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더 중요하고 분명한 것은 韓國林氏와 中國林氏는 同一位置에서 獨立性을 갖이고 있으며 韓國林氏는 韓民族으로 文化를 이루어 왔고 韓國의 오랜 歷史속에서 成長했으며 한반도 姓氏의 10위권내에 大姓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이다.<BR>마지막 더 한번 强調하고 싶은 것은 韓國林氏의 淵源은 八及 公으로부터 찾아야하고, 그 以上의 系代는 參考(나의 所見)로 할 것이며 이 부분의 學問的 定立은 韓國林氏中央會 上系族譜硏究分科委에서 적절한 정의(定義)가 있어야 할 것으로 믿는다.<BR>◉ 여행기간 : 2001.12.5~11<BR></P></TD></TR></TBODY></TABLE></B></P></FON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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